박일영목사님 정리하신 - 박득훈 목사님의 “팔복” 설교 (중앙루터교회 사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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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영목사님 정리하신 - 박득훈 목사님의 “팔복” 설교 (중앙루터교회 사경회)

루터란 1 86
박득훈 목사님의 “팔복” 설교 (중앙루터교회 사경회)

1.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가난한 마음은 물론 자기 학대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경륜있고 모범되고 성숙한 사람들이 가난한 마음 갖기 어렵다. 회개할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한 마음 갖기 위해 일부러 죄지을 필요 없다.

우선 자신의 과거에 눈길을 돌리지 말고, 특별히 자기보다 못난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라. 세리와 비교하며 기도했던 바리새인처럼 되지 말라.

내 앞에 놓여진 과제를 생각해 보라. 특히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의 모습, 내가 나가야 할 방향, 내가 해야할 일을 생각해 보라. 잡았다 이루었다 생각하지 않고, 푯대를 향해 길을 멈추지 않았던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서 내게 주어진 과제 앞에서 나는 한 없이 가난해 질 수밖에 없다. 글을 써야 하는데, 책을 읽을수록 읽을 게 더욱 늘어난다. 도서관 가기가 제일 무섭다. 온통 못 읽은, 그러나 읽어야 할 책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마음이란 이런 마음이다.

2.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

슬퍼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미사여구의, 신학적 위로의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저 같이 울어주는 일이 가장 위로가 된다.

세월호 3주년을 맞아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했다. 5주년을 맞아 우리는 다시 기도한다. “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느냐고.” 신학적으로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예수님, 그분은 그저 우리 곁에 오셔서 함께 우실 뿐이다.

윤동주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 . 그는 영원히 슬퍼할 것이다”라고 썼다.

우리는 지금 살만한 세상을 살고 있는가? 오늘날 슬픔으로 가득찬 세상은 함께 슬퍼할 사람들, 함께 슬퍼할 교회를 필요로한다. 지금도 예수님은 위대한 슬픔을 가지고 우리와 함께 슬퍼하신다.

3.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온유함이란 이것도 저것도 상관 않는 줏대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나는 죽더라도 저 사람은 살아야 하겠기에, 돌멩이를 맞더라도 옳은 말, 해야 할 말은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해서 돌멩이를 맞는다면 그저 돌멩이를 맞는 사람, 그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다. 예수님과 스데반이 그 온유함의 예이다. 돌멩이를 맞았다. 돌멩이 맞을 짓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영광을 바라보며 그분들은 “저들의 죄를 저희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었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몇 일만 금식해 보아도 온통 먹는 것밖에는 생각이 안 난다. 이런 굶주림처럼 정의를 갈망하고 목말라하는 사람, 정의가 실현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은 느낌으로 사는 사람, 그 사람은 복이 있다. 한국은 루터의 칭의론을 완전히 왜곡시켰다. 은혜만 말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십일조, 주일 성수 어려운 일이고,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이건 인정의 욕구가 남보다 조금만 더 강해도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은혜가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오직 믿음”인 것이다.

함석헌 선생님은 이러한 그리스도인을 “흰 손”에 비유하셨다. “손에 피 한 방울 없이, 피는 남에 손에만 맡기고 . . . 너희 손은 희기만 하구나.” 주님의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면 정의에 대한 굶주림과 갈망이 없을 수 있는가?

정의는 추상적,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마 25장에서 주님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현실적인 돌봄을 필요로하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외면할 수 없는 마음이 곧 정의에 주린 마음이다. 이런 마음은 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바로 예수님의 심장이다!

특히 이런 사람에게 배부름의 약속이 주어졌다. 이런 사람들에겐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단 “집”은 약속하지 않으셨다. 예수님 자신이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소명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다 책임져 주신다는 약속이다. 이 약속을 믿는 사람은 생활 걱정하지 않는다. 채워주시는 것이 멈추어진다고 느낀다면, 그건 하나님이 나를 보고 싶어하시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래도 속으론 “설마”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사람은 세상적 배부름은 맛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배부름과 비교가 되지 않는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배부름이다. 이 배부름의 한 측면은 같은 목마름을 나누는 “동지”들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5.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신다. 제사를 정성껏 드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시간과 물질을 드려야 한다. 그러나 자비가 어려운 것은 자신을 다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것도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자비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고 비난을 받으실 때, 제사보다 자비를 원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끼리 함께 밥을 먹을 때 편안하다.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편안한 사람이 되어 주신 것이다.

바울은 매를 맞고 옥에 갇혀 죄수들과 함께 했지만, 그 자리에서 찬양을 했고, 그 때 옥문이 열려 다른 죄수들도 옥에서 풀려났다.

실정법에 따라 엄중하게 심판해야 할 사람들 분명히 있다. 그러나 실정법의 질서는 대개 있는 사람들 편이다. 분명 소수일지라도 억울한 사람들이 있다. 자비의 하나님은 그 억울한 몇 사람을 위해서라도 비록 죄가 분명한 사람들이라도 함께 옥문을 열어 주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신다.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자베르는 정의구현에 집착하는 원칙주의자로서 장 발장을 기어코 심판하고자 하지만, 정작 장 발장에 의해 도움을 받게 될 때 그는 그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엄격함 때문에 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자비로울 수 없다. 용서와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그 필요를 마음 속 깊이 느끼고 그 자비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비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

6.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복이 있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못 산다는 말을 하지만, 이 말은 스스로 깨끗한 척 깔끔을 떠는 고기 옆에서는 살기 어렵다는 말이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말은 앞의 덕목을 다 포함한다. 자기의 욕망이 사라진 사람이다. 행복을 높은 곳에서 찾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마음에서 행복을 찾는다. 이 마음은 인간적 노력 끝에 오는 것이 아니다. 시편 51편은 이렇게 노래한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정한 마음, 정직한 영은 하나님이 내 마음 가운데 창조해 주실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내가 스스로 깨끗해지려는 일은 너무도 힘들고 괴로운 일이다. 하나님이 주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하늘을 쳐다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을 쉽게 쳐다보지 못한다. 내 마음을 가리고 있는 먹구름 때문이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 먹구름 아래에서 아무리 애써보았자 소용없다. 믿음은 그것을 찢는 것을 요구한다. 믿음 안에서 찢으면 찢어진다.

7-8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박해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6번째까지의 복은 내면에 집중해 있다면, 7, 8번째의 복은 외면을 향해 있다. 이 둘은 분리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내면을 풍요하게 하는 일에만 관심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다. 헨리 나우웬은 영성 계발은 내적 여정만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가는 외적인 여정도 필요하다고 했다.

이들은 전쟁이 없고 평화로운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창출하는 예언자적인 사람들이다. 세상은 이러한 새로운 성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다.

요즘 교회 지도자들이 정부를 향해 “왜 교회를 박해하느냐”고 항변하는데, 그 이유가 종교과세 때문이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박해는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이 아니다. 수 년전 한 교단의 감독이 몇 억을 횡령한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다. 그 때 판사가 그 목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돈과 권력을 쌓아 두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판사가 법정에서 교회 지도자에게 이렇게 훈시를 했다. 가슴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다.

교회는 평화를 위해서,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이 되고, 정의가 구현되기 위해 박해받아야 하는 것이다.

평화의 희랍어는 ‘에이레네’이고 히브리어가 ‘샬롬’이다. 한글 번역의 “화목”은 너무 좁은 의미이다. 에이레네는 1. 적대관계가 해소된 상태; 2. 온전함, 즉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온전함을 이룬 상태; 3. 사회 복지의 개념도 포함된다. 4. 내적 평화가 현실이 되어 염려와 근심이 사라진 상태인데,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어떤 종류의 차별이 사라진 경우에 성립된다. 사람들이 본질적인 면에서 하나가 될 때 가능해 진다.

화목을 교회 안에 국한해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면서 “평안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숨은 평화의 기운이다. 성령이 곧 이 평화의 기운이다. 예수님은 이 평화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시면서 교회로 가라하지 않고, 세상으로 나가라고 하셨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교회 내에서 불화가 생기면 화목하지 못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술에 취하는 사람들이 훨씬 쉽게 화목을 이룬다. 세상적인 평화 어려운 것이다. 전쟁 중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 일은 세상 사람들이 더 잘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평화의 기운을 받아 특별한 의미에서 평화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김교신 선생님이 왜 우리를 설탕이라고 하지 않고 소금이라고 했는가 물은 적이 있다. 설탕은 필요할 때 사탕이든 여러 방식으로 직접 섭취한다. 그러나 소금은 대체로 직접 섭취하지 않는다. 곰국에 넣어 소금은 없어지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된다.

사도 바울은 배에서 광풍을 맞았을 때, 그리고 섬에 상륙했을 때, 신으로 추앙을 받을 정도로 관심을 받는다. 전도하기 좋은 절호의 기회다. 그러나 그는 전도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사람 살리는 일”에 관심했다. 그들을 움직인 것은 이 바울에게서 나온 “평화의 기운”이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우리는 많이 울어야 한다. 정말 아픈 땅이다. 전쟁에서 200만명을 서로 죽이고, 이편저편 가리지 않고 정말 많이 죽였다. 우리는 전쟁 시작을 6.25로 정확히 기억한다. 그러나 언제 전쟁이 끝낱는지 잘 모른다. 종전이 아니라 정전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마음 가운데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 마음 속에는 한으로 가득 차 있다. 북한에 관한 말만 나오면 “북이 좋으면 북에 가서 살아라”라고 말한다. 그분들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한으로, 원한과 증오로 가득차 있다. 우리 모두 너무 아파서 평화를 모른다.

우리 정말 모두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이 아픈 마음을 치유해 달라고. 치유의 영인 성령으로 충만하도록.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아픔을 치유할 수 없고, 결코 평화를 갈망할 수도 없다.

북한과의 관계, 군사력 튼튼히 하자. 전쟁 없도록 대비해야 한다. 이 든든하게 만든 군사력 위에서 대화할 때는 한번 마음을 열어보자.

또한 자본주의는 결코 평화를 주지 못한다. 한 경제학자는 시장은 서로 교환하는 장소로서 모든 사람들은 함께 묶는 역할을 한다고 하지만, 이건 거짓 평화이다. 시장에선 돈 많은 사람만이 평화를 누리는 법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평화 평화 노래를 하지만 평화는 없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경제학자는 자본주의는 결코 노력에 따른 공정한 보상을 분배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옛날 계급사회에서는 밑의 사람들을 착취하면서도 보호를 해 주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한완상씨는 팔복 중 7복이 제일 맘에 든다 하셨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주여 주여 하지만 하나님이 모른다고 할 사람들이 있다고 하셨다. 그러나 7복의 약속에 따르면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하나님이 신발 벗고 뛰어나 맞이하실 것이다. 자녀이기 때문이다.

정의와 평화는 별개가 아니다. 이사야 2:17에 의의 열매는 평화라 했다. 정의가 실현되면 자동적으로 평화가 열린다. 다시 정의를 추상적으로 만들지 말자.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서 정의의 과제를 발견해야 한다.

부자들이 자기 만족을 위해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은 정의가 될 수 없다. 정말 그들과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정의를 만들 수 있다. 고뇌는 내가 갈아 입는 옷이라는 표현이 있다. 선심쓰는 것으로 정의를 만들 수 없다.

요즘 건국절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입장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1919년 임정이 아닌 1948년 정부수립을 건국절로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단 한가지 조건이 있다. 제헌헌법 제84조의 정신이 복원되면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84조 내용은 이렇다: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

이런 경제적 사회적 정의를 우리 국민들 모두가 누릴 수 있다면 건국절이 언제가 되든 상관이 없다. 그러나 권력과 돈과 언론 등의 힘을 가진 사람들이 이 법의 정신을 회복하려 한다고 믿을 수 있을까? 기득권자들에게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기에 진정한 정의와 평화를 갈망하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미움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을 약속하셨다. 이런 복된 사람들이 곧 교회이다. 이 교회가 이런 복된 사람들로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1 Comments
안젤리나 04.15 03:39  
귀한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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